[6월 추천도서] 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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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추천도서는 최근 번역된 장-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문학과지성사)입니다. 100쪽 안팎의 가벼운 분량의 이 책은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책입니다. 신학적 주제이지만 신학이나 신앙에 국한되지 않은 책입니다. 철학과 문학, 그리고 미술이 신학과 어우러진 책입니다. 부피로 얕잡아 볼 수 없는 책입니다. 그랬다가는 큰 코 다칠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낸다면 이제까지 읽었던 신앙서적이나 부활 설교와는 전혀 다른 깨달음과 그 깨달음이 제공하는 희열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이제까지 부활절 때마다 들었던 설교의 대부분이 시시하다고 느꼈습니다. 동어 반복을 하는 설교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물론 설교는 설교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적 부활 논의 또한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걸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학이나 설교가 그 너머를 사유하고, 그로 인해 오늘의 어떤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거의 무관심하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부활을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게토 언어로 묶어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이번에는 추천글을 바로 쓰지 않고 저의 독서 노트를 먼저 올립니다. 혹시 어려운 책을 읽는데 이런 형식이 조금이나마 맥락을 파악하는데 힌트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입니다. 형식을 갖춘 이 책의 추천글은 독서 토론 며칠 전 쯤에 올릴 예정입니다. 인용하는 문장들의 쪽수를 밝혔습니다.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것은, 비록 어떤 부분을 배제하고 인용한 것에서 이미 글쓴이의 시각이 개입된 것은 맞지만 그렇더라도 가급적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6월의 추천도서 요약
『나를 만지지 마라』
-장 뤽 낭시 저, 이만형, 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정가: 11000원
프롤로그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복음 14:9절)
-보여주어야 할 사물이나 인물은 없다. 드러내거나 계시되어야 할 사물이나 인물은 없다. 계시revelation를 숨은 실재의 드러냄이나 신비의 해독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나 유일신교 일반의 종교적 혹은 신앙적 양태(재현의 한 형식 또는 주관적 앎의 한 형식이라는 의미에서)일 뿐이다. 그러나 계시는 그 심층 구조에서 비종교적이고(혹은 종교의 자기해체deconstruction가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 신앙적이다. p.11
(예수의) 비유의 목적은, 보지 못하는 자를 맹목(盲目) 속에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상화를 통한(‘알레고리’나 예시를 통한) 교육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반대로 교육의 거부 혹은 부인(否認)이다. p.13
-비유는 이미지로부터 의미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지로부터 어떤 투시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투시는 주어진 것일 수도 있고 주어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p.14-15.
-비유는 그 말의 뜻을 이미 이해한 사람에게만 말한다. 이미 본 사람에게만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반대로 보아야 할 것을 감추고, 보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감춘다. 이런 생각에 대한 가장 편협하고 가장 안타까운 종교적 해석은 진리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그것도 경전에 근거해, 아주 소수인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그것도 경전에 근거해, 아주 소수인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다고 하는 해석이리라. p.15
-한편, 평범한 종교적 해석은 비유가 모호하고 잠정적인 비전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볼 것을 채근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분명 경전이 하지 말라고 금하는 것이다(비록 이러한 해석이 흔한 것이라 할지라도). p.15
- “이미지”는 오직 하나일 뿐이며, 그 앞에서의 ‘눈뜸’vision도 ‘눈멂’cecite도 오직 하나라는 것이다. 비유는 ‘눈뜸’vision과 ‘눈멂’cecite을 회복시킨다. 그것은 진리에 눈 뜨는 힘을 가졌거나 혹은 못 가졌거나 한 상태를 되돌려준다. p.16
-비유는 원뜻에 대한 형상의 관계도, 실재에 대한 외관의 관계(모방적) 관계도 아니다. 비유는 이미지가 보는 능력과 맺는 관계 속에 있다. 이미지는 보여야 보인다. 그리고 이미지는 눈뜸이 그것 안에서 그것을 통해 일어날 때 보인다. 그것은 눈뜸이 이미지를 통해 그리고 이미지 안에서 주어질 때만, 보는 능력이 보게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지와 보는 능력 사이에는 모방imitation이 있는 게 아니라 참여paticipation와 침투가 있다. ‘봄’이 보이는 것에 참여하고 다시 보이는 것이 안 보이는 것에 참여하는 것, 그것은 바로 ‘봄’ 그 자체와 다를 바 없다. p.16-17.
-비유는 그 자신 ‘보는 능력’을 주는 일 그리고 이미 그것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그 이상”을 갖게 해 주는 일에 참여한다. -p.17.
-비유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술한다. 비유는 우화다. P. 19
-그러나 기독교는 비유는 다른 길을 연다. 그 길은 근대 문학 전체가 뭔가 본질적인 관계를 매었을 수도 있는 길이다(혹은 근대 예술 전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어떤 의미에서는 이 조그만 책자는 얼마간 이 가설을 해명하는데 바쳐져 있다). P. 19
-메시지는 닫힌 귀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반면, 열린 귀에는 어떤 가르침 이상의 것을 말한다. P.20.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당신의 어두운 가슴이다. ....자신의 고유한 독자를 창조하는 이는 바로 저자 자신이다. 언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의 출현 아니 과잉-의미l'outre-sen의 출현이다. 즉, 내가 말 건네는 소리를 스스로 듣는 동시에,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귀와 더불어 타인의 귀에까지 대답이 전해지는 것을 듣게 되는 특별한 메아리의 울림이 중요한 것이다. p. 21
-이게 믿음과 신앙을 화해가 불가능하게 끔 갈라 놓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신앙은 타인에게서도 신앙이 증명되고 강화될 수 있는(그는 선한 존재이다. 그는 나를 구원한다) 일종의 동일성을 제기 혹은 가정하는데 비해, 믿음은 어떤 예기치 않은 부름이 타인으로부터 들려오는 걸 허용하는 것,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청취의 상황 속에 스스로가 놓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과 믿음을 갈라 놓는 것은 똑같이 종교와 문학·예술을 갈라 놓는 것이기도 하다. 전제가 있다면, 이 용어들을 완전히 참다운 의미로 이해한다는 조건하에서 실로 듣는 게 문제다. 우리 자신의 귀로 하여금 듣게끔 하여 그것이 듣는 것을 듣는 것, 우리 자신의 눈으로 하여금 보게끔 하여 그것이 보는 것을 보는 것 말이다. 그 눈과 귀를 열면서 그것들을 열림 속에 스스로는 저물어버리는 바로 그것을. p.22.
떠남
-(이 에피소드)는 그의 생애와 그의 소명을 통째로 가리키는 비유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그는 말하고 말을 건네고 그리고 떠난다. p.23
-기독교는 접촉의 종교, 감각의 종교, 몸과 마음에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종교를 발명했다.p.30.
-가장 중요한 역설은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막14:22와 “나를 만지지 마라” p.30-31.
-그리스도는 의도적으로 그의 부활한 몸을 만짐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예수는 사람들이 그를 만지는 것을 금지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활절 아침 그가 최초로 나타나는 그 순간에 그는 막달라 마리아의 몸짓을 제어하고 경고하는 있는 것이다. 만지면 안 되는 것, 그것은 부활한 몸이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만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몸은 만질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의 몸이 공기화된 육체, 혹은 비물질적인 몸, 유령의 몸, 환영으로서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p.31.
-그 몸의 존재함, 그리고 그가 부활했다는 진실이 빠져나감 속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범접’의 척도를 제공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즉, 그를 만지지 않으면서 그의 영원성에 다가가라는 그것이다. 그의 명백한 현존을 만져서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의 떠남 속에 존재하는 그의 진짜 현존에 다가가라는 것.p.31-32.
-진정한 접촉과 현존은 그가 떠나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32.
-부활은 용기(surrection)이다. 즉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 타자인 것, 사라지는 도중에 있는 것이 몸 자체 안에서, 몸으로서 돌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술이 아니라 마술의 정반대다: 죽은 몸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무덤의 “비어 있음”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신학에 의해서 “영광스런”이라고 명명될 몸은 이 ‘빔’이 바로 현존의 비워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p. 33.
-근본적으로 멀어져가는 것, 그리고 멀어지면서 그 거리 자체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범접하거나 멈춰 세우려 하지 마라. 그것은 너의 기대를 결정적으로 배반하면서, 일어서지 않는 그것 자체를 네 앞에 너를 위해 일어서게끔 하는 것이다.p. 33
-몸의 들림이라는 우리의 표현에서 (일으켜 세움과 떠남은) 불가분리이다. p.40.
“메 무 합투-놀리 메 탄게레”
요한복음 20: 13-18
-이 장면은 ‘봄’vision의 사건을 둘러싸고 구성되어 있다. 마리아는 우선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텅 빈 무덤과 거기를 들여다보려는 욕망과 공포와의 관련 속에서 전체의 장면이 전개된다. 마리아는 예수를 보게 되고, 예수는 그녀가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보도록 한다. 볼 것이 없는 데를 본다는 것, 오로지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시선, 즉 이미 보이지 않는 분을 어둠 속에서 보고 알아낸 눈들에게만 보이도록 주어질 수 있는 이를 본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장면의 문제로서, ‘놀리 메 탄게레(나를 붙들지[만지지]마라)’가 그 핵심 모티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풀이하면 이렇다: “그대는 본다. 그러나 이 ‘봄’은 ‘만짐’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왜냐면 만짐 그 자체가 즉각적 현존을 형상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현존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대는 그대 앞에서 보는 이가 이미 만남의 장소를 떠났기 때문에 그대의 손이 미칠 수 있는 거리 너머에 있는 만질 수 없는intouchable 이를 접하고 있다touche." p.43.
-이 에피소드의 신학적 비중은, 믿음의 위대한 상징들(수태고지, 탄생, 수난 :엄격한 의미에서의“ 부활, 승천)에 비하면 가녀리다. 그런데도 화가들이 이 에피소드에 매달렸다면, 그것은 이 에피스도가 ‘봄’의 특별히 미묘하고도 복잡한 연단(鍊鍛)을 장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모든 것이 텅 빈 빈 무덤 앞에서 시선이 급격히 무덤으로부터 벗어나는 중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여지도록 제공된 것이 복잡한 봄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 뭐가 뭔지 불분명하다가, 말에 의해서 보충되는가 했더니, 결국에는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로 놓여서, 이 보여진 존재를 떠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 동안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 43-44
-화가들은 .....심지어 복음서들에서는 암시조차 되지 않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그때 그들의 그림은 어느 정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정면에서 마주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눈에 눈부심이 일어날 때까지, 화폭이 작렬할 때까지, 보고 보게 하는 몸짓을 지속시키기 위한 시도이다.p. 44-45
-믿음은 어떤 것도 보통의 눈과 귀로 느끼는 데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자리에서 보고 듣는 데 있다. 믿음은 만지지 않고서도 보고 들을 줄 안다. 그런 것이 또한 엠마오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것이다. p.46.
-이 점에 비추어볼 때, ‘나를 만지지 마라’는 가장 미묘하고도 가장 신중하게 배려된retenue(이 말이 가장 맞춤하다) 장면을 구성한다. 때문에 화가들은 거기에서 기적의 황홀한 비전이 아니라, 볼 수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우여곡절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니, 이 둘 각각은 상대를 요청하면서도 배척하고, 상대방에게 가 닿으면서도 그를 자신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이 우여곡절을 가장 명료하게 포착한 화가이다. p.47.
정원지기
-이 봄이 품고 있는 사연의 또 다른 양상은 정원지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막달라 마리아의 최초의 오해 안에 있다. ...이 오해는 본명히 해명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p.51
-믿음은 알고 있는 것을 알아보는 데 있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에 신뢰를 보내는 데에 있다(그리고 분명,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의 대체물로 간주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신앙이지 믿음이 아니다).p.53.
-그녀는 듣기 때문에 믿는다.(보고 믿는 게 아니다) 그녀는 그녀에게만 건네는 말을 듣는다.
-화가들은 “정원지기”의 문제를 예수의 모습에 그 직업의 부속물-삽, 가래 혹은 괭이, 밀짚모자-을 덧붙임으로써 해결하였다.p.55.
-“내가 너를 부른다는 걸 알아들어라. 그리고 내가 떠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위해, 떠나라고 말하기 위해 내가 너를 부른다는 걸 알아들어라. 다른 어떤 걸 들으려고 하지 마라. 너에게만 말한다는 걸, 그리고 내가 떠난다는 사림만을 들어라.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나는 네게 어떤 것도 밝혀 보여주지 않는다. 너는 정원지기만을 본다. 가서 내 말 그대로 말하거라: 내가 떠났다는 것을.”-p. 57.
손들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너를 만진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닿는 이가 누구든 물러서게 한다.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만짐의 감각이 만지지 말라고 명령한다. p.65.
막달라 마리아.
-그녀에 앞서 무덤에 왔던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졌다. 반면, 그녀는 거기에서 본다. 그녀가 무덤을 밤을 흩어버리는 게 아니다. 그녀는 부재를 지키고 있는 이들, 무덤을 비워진 상태 그대로 지키고 있는 이들의 현존을 보는 것이다. 얼마 전, 그가 이미 죽은 걸 볼 줄 알아, 아직 살아 있는 이의 몸을 향유로 씻었던 것처럼, 바로 그 사랑 있는 이의 몸을 무덤 안에서 볼 줄 안 그녀는 이제 그녀를 제 이름으로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안다. 그녀는 죽음 속에서 삶을 본다. 왜냐하면 삶 속에서 죽음을 보았었기 때문이다.p.75.
-중요한 것은 어둠 안에서 눈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눈들이 그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p.76.
나를 만지지 마라
-그의 영광은 볼 줄 아는 눈들에게만 빛난다. p.82.
-저마다 부활한다. 하나하나, 그리고 전신(全身)이corps pour corps.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복음서를 거쳐 이슬람에 이르기까지 유일신 사상의 문화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교훈이다. 부활은 참 삶[실존]의 개별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개별성을 이름으로서 가리키고, 또한 그 이름을 죽은이의 이름으로서 가리키며, 족음을 이름으로부터 의미화를 떼어놓는 것으로서 가리킨다. 명명된다는 것, 그것은 떠남 중에 놓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를 저의 부두에서 떠나게 해, 실로 거기에 접안조차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의미에 가 닿지 못하게 되리라. 바로 거기에 진리가 있다. 또한 그것이 삶/죽음, 정원/무덤을 그 의미를 텅 비게 하고 동시에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p. 82-83.
-“나를 만지지 마라, 나를 붙들지도 마라, 찾지도 붙잡지도 막지도 마라. 모든 집착을 포기해라. 친숙과 안전을 생각지 마라. 도마가 원하게 되는 것처럼 어떤 확증이 있으리라고 믿지 마라. 어떤 방식으로든 맹신치 마라. 그러지 말고 이 불-신앙 속에 확고히 머물러라. 거기에 충실해라. 내 떠남에 충실해라. 내 출발 안에서 유일하게 남는 이것에 충실해라. 내가 발음하는 네 이름에. 네 이름 안에는 포착할 것도 전취할 것도 없다. 있다면 이런 게 있을 뿐이다. 네 이름은 저 아득한 옛날부터 결코 끝나지 않을 저 훗날까지, 언제나 떠나고 있는 바닥 모를 바닥으로부터 네게 발송되었다는 것을.” p.83-84.
-대관절 왜 몸인가? 왜냐하면 몸만이 쓰러지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만이 만지거나 만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순수한 정신”은 단지 완전히 그 자신에게 닫힌 현존의 형식적이고 공허한 지표들만을 제공한다. 몸은 이 현존을 개방한다. 그것은 이 현존을 현재화하고 바깥에 내놓는다. 몸은 그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그 사실을 통해서 다른 몸들과 함께 그것을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사라진 이의 진정한 몸이 된다.-p.86
에필로그
-이 장면을 그린 화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내 손들은 나타나지 않는 나타남을 향해 뻗쳐 있소이다. 장면 전체를 허물어버리는 떠남을 향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로 있는 유사성을 향해. 빛과 함께 재현의 회피를 도모하는 어둠을 향해.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말을 내게 되풀이하는 동기이자 화폭인 것을 향해.-p. 87.
추신:
역자 후기와 두 번역자의 해설은 일부러 배제하였습니다. 본문과 씨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6월의 추천도서는 최근 번역된 장-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문학과지성사)입니다. 100쪽 안팎의 가벼운 분량의 이 책은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책입니다. 신학적 주제이지만 신학이나 신앙에 국한되지 않은 책입니다. 철학과 문학, 그리고 미술이 신학과 어우러진 책입니다. 부피로 얕잡아 볼 수 없는 책입니다. 그랬다가는 큰 코 다칠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낸다면 이제까지 읽었던 신앙서적이나 부활 설교와는 전혀 다른 깨달음과 그 깨달음이 제공하는 희열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이제까지 부활절 때마다 들었던 설교의 대부분이 시시하다고 느꼈습니다. 동어 반복을 하는 설교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물론 설교는 설교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적 부활 논의 또한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걸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학이나 설교가 그 너머를 사유하고, 그로 인해 오늘의 어떤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거의 무관심하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부활을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게토 언어로 묶어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이번에는 추천글을 바로 쓰지 않고 저의 독서 노트를 먼저 올립니다. 혹시 어려운 책을 읽는데 이런 형식이 조금이나마 맥락을 파악하는데 힌트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입니다. 형식을 갖춘 이 책의 추천글은 독서 토론 며칠 전 쯤에 올릴 예정입니다. 인용하는 문장들의 쪽수를 밝혔습니다.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은 것은, 비록 어떤 부분을 배제하고 인용한 것에서 이미 글쓴이의 시각이 개입된 것은 맞지만 그렇더라도 가급적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6월의 추천도서 요약
『나를 만지지 마라』
-장 뤽 낭시 저, 이만형, 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정가: 11000원
프롤로그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복음 14:9절)
-보여주어야 할 사물이나 인물은 없다. 드러내거나 계시되어야 할 사물이나 인물은 없다. 계시revelation를 숨은 실재의 드러냄이나 신비의 해독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나 유일신교 일반의 종교적 혹은 신앙적 양태(재현의 한 형식 또는 주관적 앎의 한 형식이라는 의미에서)일 뿐이다. 그러나 계시는 그 심층 구조에서 비종교적이고(혹은 종교의 자기해체deconstruction가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 신앙적이다. p.11
(예수의) 비유의 목적은, 보지 못하는 자를 맹목(盲目) 속에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상화를 통한(‘알레고리’나 예시를 통한) 교육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반대로 교육의 거부 혹은 부인(否認)이다. p.13
-비유는 이미지로부터 의미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지로부터 어떤 투시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투시는 주어진 것일 수도 있고 주어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p.14-15.
-비유는 그 말의 뜻을 이미 이해한 사람에게만 말한다. 이미 본 사람에게만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반대로 보아야 할 것을 감추고, 보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감춘다. 이런 생각에 대한 가장 편협하고 가장 안타까운 종교적 해석은 진리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그것도 경전에 근거해, 아주 소수인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그것도 경전에 근거해, 아주 소수인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다고 하는 해석이리라. p.15
-한편, 평범한 종교적 해석은 비유가 모호하고 잠정적인 비전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볼 것을 채근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분명 경전이 하지 말라고 금하는 것이다(비록 이러한 해석이 흔한 것이라 할지라도). p.15
- “이미지”는 오직 하나일 뿐이며, 그 앞에서의 ‘눈뜸’vision도 ‘눈멂’cecite도 오직 하나라는 것이다. 비유는 ‘눈뜸’vision과 ‘눈멂’cecite을 회복시킨다. 그것은 진리에 눈 뜨는 힘을 가졌거나 혹은 못 가졌거나 한 상태를 되돌려준다. p.16
-비유는 원뜻에 대한 형상의 관계도, 실재에 대한 외관의 관계(모방적) 관계도 아니다. 비유는 이미지가 보는 능력과 맺는 관계 속에 있다. 이미지는 보여야 보인다. 그리고 이미지는 눈뜸이 그것 안에서 그것을 통해 일어날 때 보인다. 그것은 눈뜸이 이미지를 통해 그리고 이미지 안에서 주어질 때만, 보는 능력이 보게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지와 보는 능력 사이에는 모방imitation이 있는 게 아니라 참여paticipation와 침투가 있다. ‘봄’이 보이는 것에 참여하고 다시 보이는 것이 안 보이는 것에 참여하는 것, 그것은 바로 ‘봄’ 그 자체와 다를 바 없다. p.16-17.
-비유는 그 자신 ‘보는 능력’을 주는 일 그리고 이미 그것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그 이상”을 갖게 해 주는 일에 참여한다. -p.17.
-비유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술한다. 비유는 우화다. P. 19
-그러나 기독교는 비유는 다른 길을 연다. 그 길은 근대 문학 전체가 뭔가 본질적인 관계를 매었을 수도 있는 길이다(혹은 근대 예술 전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어떤 의미에서는 이 조그만 책자는 얼마간 이 가설을 해명하는데 바쳐져 있다). P. 19
-메시지는 닫힌 귀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반면, 열린 귀에는 어떤 가르침 이상의 것을 말한다. P.20.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당신의 어두운 가슴이다. ....자신의 고유한 독자를 창조하는 이는 바로 저자 자신이다. 언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의미의 출현 아니 과잉-의미l'outre-sen의 출현이다. 즉, 내가 말 건네는 소리를 스스로 듣는 동시에,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귀와 더불어 타인의 귀에까지 대답이 전해지는 것을 듣게 되는 특별한 메아리의 울림이 중요한 것이다. p. 21
-이게 믿음과 신앙을 화해가 불가능하게 끔 갈라 놓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신앙은 타인에게서도 신앙이 증명되고 강화될 수 있는(그는 선한 존재이다. 그는 나를 구원한다) 일종의 동일성을 제기 혹은 가정하는데 비해, 믿음은 어떤 예기치 않은 부름이 타인으로부터 들려오는 걸 허용하는 것,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청취의 상황 속에 스스로가 놓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과 믿음을 갈라 놓는 것은 똑같이 종교와 문학·예술을 갈라 놓는 것이기도 하다. 전제가 있다면, 이 용어들을 완전히 참다운 의미로 이해한다는 조건하에서 실로 듣는 게 문제다. 우리 자신의 귀로 하여금 듣게끔 하여 그것이 듣는 것을 듣는 것, 우리 자신의 눈으로 하여금 보게끔 하여 그것이 보는 것을 보는 것 말이다. 그 눈과 귀를 열면서 그것들을 열림 속에 스스로는 저물어버리는 바로 그것을. p.22.
떠남
-(이 에피소드)는 그의 생애와 그의 소명을 통째로 가리키는 비유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그는 말하고 말을 건네고 그리고 떠난다. p.23
-기독교는 접촉의 종교, 감각의 종교, 몸과 마음에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종교를 발명했다.p.30.
-가장 중요한 역설은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막14:22와 “나를 만지지 마라” p.30-31.
-그리스도는 의도적으로 그의 부활한 몸을 만짐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예수는 사람들이 그를 만지는 것을 금지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활절 아침 그가 최초로 나타나는 그 순간에 그는 막달라 마리아의 몸짓을 제어하고 경고하는 있는 것이다. 만지면 안 되는 것, 그것은 부활한 몸이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만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몸은 만질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의 몸이 공기화된 육체, 혹은 비물질적인 몸, 유령의 몸, 환영으로서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p.31.
-그 몸의 존재함, 그리고 그가 부활했다는 진실이 빠져나감 속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범접’의 척도를 제공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즉, 그를 만지지 않으면서 그의 영원성에 다가가라는 그것이다. 그의 명백한 현존을 만져서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의 떠남 속에 존재하는 그의 진짜 현존에 다가가라는 것.p.31-32.
-진정한 접촉과 현존은 그가 떠나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32.
-부활은 용기(surrection)이다. 즉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 타자인 것, 사라지는 도중에 있는 것이 몸 자체 안에서, 몸으로서 돌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술이 아니라 마술의 정반대다: 죽은 몸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무덤의 “비어 있음”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신학에 의해서 “영광스런”이라고 명명될 몸은 이 ‘빔’이 바로 현존의 비워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p. 33.
-근본적으로 멀어져가는 것, 그리고 멀어지면서 그 거리 자체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범접하거나 멈춰 세우려 하지 마라. 그것은 너의 기대를 결정적으로 배반하면서, 일어서지 않는 그것 자체를 네 앞에 너를 위해 일어서게끔 하는 것이다.p. 33
-몸의 들림이라는 우리의 표현에서 (일으켜 세움과 떠남은) 불가분리이다. p.40.
“메 무 합투-놀리 메 탄게레”
요한복음 20: 13-18
-이 장면은 ‘봄’vision의 사건을 둘러싸고 구성되어 있다. 마리아는 우선 무덤의 돌이 치워진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텅 빈 무덤과 거기를 들여다보려는 욕망과 공포와의 관련 속에서 전체의 장면이 전개된다. 마리아는 예수를 보게 되고, 예수는 그녀가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보도록 한다. 볼 것이 없는 데를 본다는 것, 오로지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시선, 즉 이미 보이지 않는 분을 어둠 속에서 보고 알아낸 눈들에게만 보이도록 주어질 수 있는 이를 본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장면의 문제로서, ‘놀리 메 탄게레(나를 붙들지[만지지]마라)’가 그 핵심 모티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풀이하면 이렇다: “그대는 본다. 그러나 이 ‘봄’은 ‘만짐’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왜냐면 만짐 그 자체가 즉각적 현존을 형상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현존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대는 그대 앞에서 보는 이가 이미 만남의 장소를 떠났기 때문에 그대의 손이 미칠 수 있는 거리 너머에 있는 만질 수 없는intouchable 이를 접하고 있다touche." p.43.
-이 에피소드의 신학적 비중은, 믿음의 위대한 상징들(수태고지, 탄생, 수난 :엄격한 의미에서의“ 부활, 승천)에 비하면 가녀리다. 그런데도 화가들이 이 에피소드에 매달렸다면, 그것은 이 에피스도가 ‘봄’의 특별히 미묘하고도 복잡한 연단(鍊鍛)을 장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모든 것이 텅 빈 빈 무덤 앞에서 시선이 급격히 무덤으로부터 벗어나는 중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여지도록 제공된 것이 복잡한 봄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 뭐가 뭔지 불분명하다가, 말에 의해서 보충되는가 했더니, 결국에는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로 놓여서, 이 보여진 존재를 떠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 동안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 43-44
-화가들은 .....심지어 복음서들에서는 암시조차 되지 않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그때 그들의 그림은 어느 정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정면에서 마주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눈에 눈부심이 일어날 때까지, 화폭이 작렬할 때까지, 보고 보게 하는 몸짓을 지속시키기 위한 시도이다.p. 44-45
-믿음은 어떤 것도 보통의 눈과 귀로 느끼는 데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자리에서 보고 듣는 데 있다. 믿음은 만지지 않고서도 보고 들을 줄 안다. 그런 것이 또한 엠마오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것이다. p.46.
-이 점에 비추어볼 때, ‘나를 만지지 마라’는 가장 미묘하고도 가장 신중하게 배려된retenue(이 말이 가장 맞춤하다) 장면을 구성한다. 때문에 화가들은 거기에서 기적의 황홀한 비전이 아니라, 볼 수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우여곡절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니, 이 둘 각각은 상대를 요청하면서도 배척하고, 상대방에게 가 닿으면서도 그를 자신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이 우여곡절을 가장 명료하게 포착한 화가이다. p.47.
정원지기
-이 봄이 품고 있는 사연의 또 다른 양상은 정원지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막달라 마리아의 최초의 오해 안에 있다. ...이 오해는 본명히 해명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p.51
-믿음은 알고 있는 것을 알아보는 데 있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에 신뢰를 보내는 데에 있다(그리고 분명,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의 대체물로 간주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신앙이지 믿음이 아니다).p.53.
-그녀는 듣기 때문에 믿는다.(보고 믿는 게 아니다) 그녀는 그녀에게만 건네는 말을 듣는다.
-화가들은 “정원지기”의 문제를 예수의 모습에 그 직업의 부속물-삽, 가래 혹은 괭이, 밀짚모자-을 덧붙임으로써 해결하였다.p.55.
-“내가 너를 부른다는 걸 알아들어라. 그리고 내가 떠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위해, 떠나라고 말하기 위해 내가 너를 부른다는 걸 알아들어라. 다른 어떤 걸 들으려고 하지 마라. 너에게만 말한다는 걸, 그리고 내가 떠난다는 사림만을 들어라.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나는 네게 어떤 것도 밝혀 보여주지 않는다. 너는 정원지기만을 본다. 가서 내 말 그대로 말하거라: 내가 떠났다는 것을.”-p. 57.
손들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너를 만진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닿는 이가 누구든 물러서게 한다.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만짐의 감각이 만지지 말라고 명령한다. p.65.
막달라 마리아.
-그녀에 앞서 무덤에 왔던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졌다. 반면, 그녀는 거기에서 본다. 그녀가 무덤을 밤을 흩어버리는 게 아니다. 그녀는 부재를 지키고 있는 이들, 무덤을 비워진 상태 그대로 지키고 있는 이들의 현존을 보는 것이다. 얼마 전, 그가 이미 죽은 걸 볼 줄 알아, 아직 살아 있는 이의 몸을 향유로 씻었던 것처럼, 바로 그 사랑 있는 이의 몸을 무덤 안에서 볼 줄 안 그녀는 이제 그녀를 제 이름으로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안다. 그녀는 죽음 속에서 삶을 본다. 왜냐하면 삶 속에서 죽음을 보았었기 때문이다.p.75.
-중요한 것은 어둠 안에서 눈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눈들이 그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p.76.
나를 만지지 마라
-그의 영광은 볼 줄 아는 눈들에게만 빛난다. p.82.
-저마다 부활한다. 하나하나, 그리고 전신(全身)이corps pour corps.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복음서를 거쳐 이슬람에 이르기까지 유일신 사상의 문화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교훈이다. 부활은 참 삶[실존]의 개별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개별성을 이름으로서 가리키고, 또한 그 이름을 죽은이의 이름으로서 가리키며, 족음을 이름으로부터 의미화를 떼어놓는 것으로서 가리킨다. 명명된다는 것, 그것은 떠남 중에 놓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를 저의 부두에서 떠나게 해, 실로 거기에 접안조차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의미에 가 닿지 못하게 되리라. 바로 거기에 진리가 있다. 또한 그것이 삶/죽음, 정원/무덤을 그 의미를 텅 비게 하고 동시에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p. 82-83.
-“나를 만지지 마라, 나를 붙들지도 마라, 찾지도 붙잡지도 막지도 마라. 모든 집착을 포기해라. 친숙과 안전을 생각지 마라. 도마가 원하게 되는 것처럼 어떤 확증이 있으리라고 믿지 마라. 어떤 방식으로든 맹신치 마라. 그러지 말고 이 불-신앙 속에 확고히 머물러라. 거기에 충실해라. 내 떠남에 충실해라. 내 출발 안에서 유일하게 남는 이것에 충실해라. 내가 발음하는 네 이름에. 네 이름 안에는 포착할 것도 전취할 것도 없다. 있다면 이런 게 있을 뿐이다. 네 이름은 저 아득한 옛날부터 결코 끝나지 않을 저 훗날까지, 언제나 떠나고 있는 바닥 모를 바닥으로부터 네게 발송되었다는 것을.” p.83-84.
-대관절 왜 몸인가? 왜냐하면 몸만이 쓰러지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만이 만지거나 만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순수한 정신”은 단지 완전히 그 자신에게 닫힌 현존의 형식적이고 공허한 지표들만을 제공한다. 몸은 이 현존을 개방한다. 그것은 이 현존을 현재화하고 바깥에 내놓는다. 몸은 그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그 사실을 통해서 다른 몸들과 함께 그것을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사라진 이의 진정한 몸이 된다.-p.86
에필로그
-이 장면을 그린 화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내 손들은 나타나지 않는 나타남을 향해 뻗쳐 있소이다. 장면 전체를 허물어버리는 떠남을 향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로 있는 유사성을 향해. 빛과 함께 재현의 회피를 도모하는 어둠을 향해.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말을 내게 되풀이하는 동기이자 화폭인 것을 향해.-p. 87.
추신:
역자 후기와 두 번역자의 해설은 일부러 배제하였습니다. 본문과 씨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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